
전통의 순환, 혹은 순환의 전승
<혹성탈출>은 반복의 영화다. 2편의 처음은 1편의 처음을 반복하는 동시에 1968년 작 <혹성탈출>의 기억을 불러왔다. 시리즈 3편에 이르러 시리즈는 영화사 전반으로 반복의 대상을 확장한다.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종의 전쟁>은 <지옥의 묵시록>을 닮은 영화다. 평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점에 주목한 것 같다. 듀나는 영화가 <지옥의 묵시록>의 캐릭터 구성을 몇몇 따오기는 했어도 "스토리보다는 묵시록이라는 개념 자체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고 보는데, 문강형준 평론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평소 자신이 가진 파국' 개념에 대한 관심과 결부시켜 <종의 전쟁>을 파국서사' 계통에 편입시킨다. 이것이 파국의 서사'에 속하는 작품인지는 몰라도, 묵시록'이라는 테마에 집중한 작품이라는 평은 대체로 수긍할만하다. 이런 선택이 뜻밖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아마도 이 영화가 묵시록을 그리면서 창세기도 같이 그리기 때문일 것이다.
얼핏 보기에 동떨어져 보이는 두 테마가 <종의 전쟁>에 공존하고 있다. 시작이 끝을 품고 끝이 시작을 품은 이 서사적 곡예는 영화 전반에 걸쳐 놀라운 균형을 유지한다. 곡예를 끝까지 잇기 위해 영화는 고전의 힘을 빌린다. 기이하게도 <종의 전쟁>은 시저가 무리와 떨어져 사적 복수를 결심한 순간부터 "내가 지금까지 대체 뭘 한 거지?"라는 탄식을 내뱉기까지, 영화의 중반부를 서부극의 형식을 빌려 채운다. 이를 위해 전편에서 공들여 개발한 캐릭터 몇몇을 비극적으로 퇴장시키는 것마저 감수할 정도다. 결과적으로 시저는 시리즈와 함께 다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쌓아올려야 한다.
묵시록과 창세기를 한데 담기 위한 그릇으로 서부극을 택한 까닭은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2편의 핵심 테마는 코바로 대표되는 폭력과 모리스로 대표되는 법의 충돌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시저는 스스로 폭력을 집행함으로써 둘의 공존 불가능을 선언하고 법에게 왕관을 씌운다. 결국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명령은 유인원을 죽인 유인원은 유인원이 아니다'라는 논리 위에 성립된다. 코바가 유인원이 아니라고 선언하며 이룩한 시저의 왕국은 태생이 동족상잔의 피로 얼룩져있다. 시저의 무모한 복수극은 실제론 시저가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낼 수 없음을 재확인하는 과정이다. 어찌 보면 그것이 서부극의 기능이기도 했다. 미국의 건국신화로 불리는 서부극은 총이 법전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종종 폭력이야말로 법의 생성자라는 칼 슈미트의 이론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 점에서 시리즈의 2편과 3편은 다소 길게 나눠 찍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같기도 하다. 혹은 이것은 <수색자>로 시작하여 출애굽기로 끝나는 이야기다. 사적 복수로 시작된 이야기가 덩치를 불려 민족의 탄생으로 끝나는 결말을 우리는 영화사 초기에 지켜본 바 있다. <종의 전쟁>은 <국가의 탄생>의 대담한 거울쌍이다.
전문 읽기: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81218000388
심사평
“'0과 1이 된 링컨과 릴리언 기쉬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 스며든 초기영화 이미지'는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라는 대중영화에서 영화사의 흔적을 읽어 내는 참신하고 창의적인 평론이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0과 1이 된 링킨과 릴리언 기쉬'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영화를 오직 이미지의 문제로 접근하는 방식은 물론, 이 평자가 지닌 그리고 요즘 들어 더욱 희귀해진 영화사에 대한 교양과 계보학의 감각에 마음이 쏠렸기 때문이다.” - 허문영,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81220000429
2019 부산일보 신춘문예 공모 평론 부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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